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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조각들 by Joh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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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조각들 에세이라 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Joh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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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조각들 에세이라 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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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조각들 에세이라 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by John Lim Copyright ©2024. Published by Brave Heifer. ISBN 979-11-9765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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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조각들 에세이라 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Joh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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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And if the fool, or the pig, are a different opinion, it is because they only know their own side of the question." John Stuart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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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Loreen, the purest, smartest and bravest little cre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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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Preface 1. 잘 쓴 에세이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1 2. 우리 모두가 에세이 교육을 죽였다 5 3. Harkness Table 과 소크라테스 대화법 9 4. 교육과 정치: 악연 혹은 필연? 13 5. 미국 K-12 시스템의 불편한 진실 17 6. 공립같지 않은 미국 공립 학교 시스템 21 7. 법치 미국 눈치 한국 25 8. 철학원의 두 얼굴 29 9. 조기(早期)교육에서 왕따당한 만기(滿期)철학 35 10. 이기적인것이 이타적이다 39 11. 죽은 글쟁이의 사회 43 12. 인공지능의 불편한 진실 47 13. 니체의 눈으로 본 MZ 세대 51 14. 에세이라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55 About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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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요즘에 인공지능 쪽이 많이 뜨고 있는거 같은데 그 쪽으로 한번 직업을 알아보는게 어때?” 아버지께서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조심히 물으셨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질문이 나에게는 “너 철학전공해서 뭐 먹고 살래?” 라고 들렸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들렸다. 갓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한참 가슴으로 세상 경험을 하고 있는 내가 알게 모르게 꽤나 걱정이 되셨나 보다. 대학을 졸업한지가 10 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버지의 그때 그 질문은 아직까지 가슴에서 맴돈다. 굳이 머리로 기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슴으로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걸. 철학은 내게 믿음과 불신, 편안함과 불안함, 따뜻함과 차가움, 행복감과 외로움 그리고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알려주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보다는 낯설지만 가슴이 뛰는 환경으로 나를 매순간 이끌었다. 철학을 접한 순간부터 Descartes 처럼 나는 매순간 강가에서 홀로 엄마 아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갓난아기처럼 두려운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무, 유생물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초반에 느꼈던 두려운, 불안한 그리고 외로운 감정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눈처럼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철학을 통해 극과 극, 모순의 관계성을 탐구하고, 몸소 경험한 결과 나만의 주관적인 축이 자연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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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와 세상의 모든것을 객관화 하니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독특한 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화를 했더니 주관화가 되버렸다. 나를 버리니 나를 찾았다. 결국 객관성과 주관성도 한 통속이더라. 세상의 모든 예술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합작품이다. Hues 라는 상대적인 조미료와 Logic 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섞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음악, 그림 그리고 에세이. 예외는 없다.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로부터 스트레스와 동시에 자유를 느끼고, 철학을 통해 고뇌와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 에세이를 쓰면서 나를 버리고 동시에 나를 찾는다. 아살라만. John Lim 미국 Virginia 에서, 2024 년 그 어느때보다 추운 7 월의 여름을 고이 보내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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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잘 쓴 에세이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센스”라는 말을 종종 대화에서 쓰곤한다. “너 오늘 옷이 왜 이래? 참 센스없네...” “너 말하는거 참 센스있다!” 대체 센스라는 말이 무었일까?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센스라는 단어를 언제 적절하게 쓸 수 있을까? 센스의 포괄적인 뜻은 sense 라는 영단어에 기반되어있다. 감각 혹은 느낌정도의 뜻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금 더 고급진(?) 표현을 쓰자면 지식 (knowledge) 보다는 직관 (intuition)에 더 가까운 녀석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예시를 하나 들겠다. 내 앞에 레몬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이 레몬을 한입 베어먹으면 어떠한 느낌이 들까? 당연히 매우 실것이다. 레몬이 매우 시다라는걸 느끼면서 눈 한번 질끔 감을때 바로 그 순간의 감각 경험 (철학에서는 이 경험을 qualia 라고 한다.)을 센스 정도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의미의 차이가 존재한다. Qualia 같은 경우는 자기 스스로 (1 인층 관점)가 느끼는 경험이라고하면 sense 는 1 인층 뿐 아니라 3 인칭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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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용된다. 레몬에 관한 지식 (예컨대 색깔, 무게, 화학성분 등)만으로는 레몬을 입에 물었을때의 매우 고통스러울정도의 신 qualia 를 절대로 경험할수도 설명할수도 없다. 지식은 우리를 객관성의 세계로만 인도한다. 센스가 자리잡고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세상은 깊은 지식으로서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즉, 무언가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지식 그리고 주관적인 센스가 함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자는 학습을 통해 이룰수 있고, 후자는 크게 가지고 태어나야 하는것이 나의 생각이다. 에세이 교육에 센스라는 것이 왜 필요한 걸까? 너의 에세이에 센스가 없다는 말은 너의 색깔이 없다는 뜻, 너만의 목소리가 글에 놓여져 있지 않다는 뜻, 더 나아가 “영혼”이 없다고 까지 할수 있겠다. 이렇듯 에세이에서 센스는 선택적인 요소가 아닌 필수적인 요소이다. 누구나 글은 쓸 수 있지만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식으로만 쓰여진 글은 특색없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건축물과 다르지 않다. 공장에서 찍어낸듯한 그 건축물이 공학적으로 혹은 물리학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건축물 고유의 색깔, 영혼 즉 센스가 없다는 건 그것만의 개별, 주관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센스의 존재 여부가 특정한 사물 (예컨대 건축물 혹은 에세이)의 존재 여부를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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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 어떻게 센스있는 에세이를 작성할수 있을까? 너만의 형식, 패턴을 통해 너의 고유성을 나타내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단시 (Shakespearean sonnet)를 예시로 들겠다. abab cdcd efef gg 의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시 형식은 그만의 독창성, 창의성 그리고 주관성을 구축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시의 패턴만으로만 사람들은 “아 이거 Shakespeare 시구나!” 하고 단번에 알수 있고 덩달아 다른 작품들과의 명백한 거리를 둘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tone 을 통해서 너만의 에세이 “색깔”을 구축 할수있다. Camus 나 Kafka 혹은 Nietzsche 와 같은 pessi-mistic, dark 그리고 cold 적인 에세이 톤을 만들수 있다. 결국 이 특정한 톤은 너의 에세이 색깔을 구축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더 나아가 너만의 센스가 묻어나는 한편의 에세이로 거듭 태어날수 있는 흙 역할을 한다. 에세이도 사람과 똑같다. 센스없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 부디 센스를 통해 너의 에세이가 많이 읽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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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우리 모두가 에세이 교육을 죽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Alderman 도서관 구석에서 철학 에세이 과제와 씨름중이였다. 일주일에 두 개 꼴로 쓰는 철학 에세이지만 매번 내 주장에 반대하는 counterargument 를 생각해 내기란 생각보다 쉽지않았다. 내 주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아니 더 맞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내 주장의 반대의 주장을 언급하고, 그리고 그것을 무모화 시키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 대학 그리고 대학원 시절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내 주장을 펼치는데 그리고 그 주장을 지키는데 쓴거 같다. 토론과 글 로써. 지금와서 대학교 시절을 추억팔이를 하니 문득 두가지 생각에 사로 잡혔다. 첫째, 내가 참 에세이에 진심이었구나. 둘째, 왜 대학에 가기전에 이것을 진지하게 접해보지 못했을까? 오늘은 이 두번째 생각에 대해 이야기좀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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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가 비로소 대학에 가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에세이에 대한 열정이 극대화 된것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다. 허나, 에세이를 개별적인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고 혹은 에세이 라는건 그냥 하면 되는거지라는 맹목적인 무지함으로 장착한 교육체제 그리고 우리들의 보편적인 무지함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육 체제 안에서 에세이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다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함이 휘발유가 되어 에세이 교육에 불을 지폈다. 대부분 초중교육에서는 에세이라는 개념보다는 책 summary 혹은 나의 의견을 몇 문단 적는게 전부다. 에세이라는 체계를 배우기보다는 그냥 단어 가지고 장난치는 거다. 글 구조, 색깔, 문법 더 나아가 logic 을 제대로 가르치는 수업도 없고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에게 에세이는 그냥 하는거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제대로 배울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고등학교에 가서야 나름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이 제대로 된(?) 교육안에 에세이는 없다. 정해진 수업진도를 빼는대에만 모든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대부분의 교육자들에게 에세이만을 위한 시간 혹은 수업은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에세이 교육은 필요가 아니라 사치다. 간혹 몇 몇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쓴 에세이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할때 너무나 general 한 피드백에 방향성 그리고 열정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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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학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거의 모든 교수들이 학생들이 에세이를 왠만큼 쓸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에 기반하여 수업이 이루어 진다. 에세이 낙오자들에게는 대학이라면 있는 writing center 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한다. 여기에 가면 실질적인 에세이 도움을 받겠지라는 무한믿음이 바로 깨진다. “Explain this” “awkward sentences” “what exactly do you mean here?” 등 별로 도움 안되는 코멘트를 보며 실질적인 도움 대신 실질적인 실망과 절망이 찾아온다. 수많은 에세이과제 감옥에 갇혀 힘겨워 하는 수감자들은 졸업을 위해 대신 내 과제를 해줄수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우리 모두가 에세이 교육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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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 Harkness Table 과 소크라테스 대화법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았을때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것이 대화 상대일 것이다. 어떤 대화를 어떻게 하는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대화를 누구랑 하는지가 더 관건일것이다.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대화의 주제를 어떻게 시작할지, 얼마나 깊게 얘기할지 혹은 어떻게 마무리 할지 등 전반적인 대화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 대화 상대가 정해지면 그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은 대화 형태와 대화법이다. 미국 보딩스쿨과 대학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Harkness Table 토론 방식과 철학에서 유례된 The Socratic Method (소크라테스 대화법)를 예시로 들어 설명하려 한다. Harkness Table 의 시작은 이러하다. 1930 년 Edward Harkness 라는 미국 자산가가 미국 탑 보딩스쿨 Phillips Exeter Academy 에 거액을 기부하고 그와 동시에 학교교육에 있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다. 시민 혹은 국민들의 말, 기대와 의지가 기반이 된 사회. Harkness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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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회뿐만 아니라 학교라는 작은사회 안에서도 민주주의의 중심이 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수의 학생들이 아닌 한명 한명의 학생의 목소리와 의견이 매우 중요하다. 총 12 명의 학생들과 1 명의 선생님이 둥그런 책상에 둘러앉아 토론을 시작한다. 선생님이 혼자 강의를 하는게 아니라 큰 주제나 질문을 던지면 한명 한명의 학생 스스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공유한다. 나와 너의 경쟁 구도 대결이 아닌 13 명이 하나되어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보탬으로서 팀이라는 틀 안에서 교육한다. 비록 Phillips Exeter Academy 에서 시작됐지만 Harkness Table 토론방식은 수많은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Harkness Table 이라는 토론 방식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구연할수 있는 토론법은 소크라테스 대화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님이 대화를 이끄는 방식이 아닌 선생님은 그저 질문자로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 질문들은 검사가 피의자에게 심문하듯, 말꼬리를 잡듯 질문한다. “당신은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학생은 자신만의 생각을 공유한다. 그 다음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follow-up 질문을 통해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 대화법은 질문을 통해 답변자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이해도를 그리고 깊이를 향상시키게 훈련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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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리는 나 자신 외 타인과의 대화라는 것을 통해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던 각도의 다른 의견을 들어볼 수 있고, 그 다른 의견들을 통해 내 주장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내 의견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함으로서 나의 주관성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Harkness Table 의 토론법과 Socratic Method 가 보딩스쿨 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실행해 보아야 하는 대화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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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4 교육과 정치: 악연 혹은 필연? 최근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미국 대학가에 칼바람이 불고있다. 반유대주의를 지지 하는 것 또한 교육기관에 속해있는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일수 있다는 몇몇 대학총장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매우 거세다. 그로 인해 최근 유펜 (University of Pennsylvania) 총장은 모교 고액기증자들의 반발에 힘입어 사퇴했다. 하버드 총장 역시 비슷한 처지로 인해 사퇴 하였다. 교육기관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에 위치해 있는 대학기관의 수장으로서 정치적인 압박과 교육이라는 큰 틀 안에서 표현의 자유 혹은 표현의 다양성을 지킨다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크게는 무언 (無言) 혹은 소극적인 긍정이 부정으로 인식된다. 라틴어 diversus 에 어원을 둔 diversity (다양성) 라는 단어는 inclusion (포함/소속감)이라는 단어와 함께 크게 교육이라는 맥락 안에서 단골 단어로 쓰인다. 세부적으로 보면 한 교육기관 (예컨데 대학교)이 내세우는 교육철학 혹은 비전안에서 반복적으로 앞서 언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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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키워드를 내세운다.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역사적 관점으로 보았을때, 크게 미국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고 좋아하는 키워드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영화 혹은 매체에서 여러 다양한 인종, 출신을 반영하기위해 그리고 한 인종만 혹은 다수의 인종만을 위한 정책을 하지 않기 위해 미국 사회 곳곳에서 diversity & inclusion 을 외친다. 미국 대학에서 특히나 좋아하는 이 키워드 diversity & inclusion. 학업 내 외 적으로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이 없다. 나만의 아이디어 혹은 주장이 최고가 아니라는, 다른 누군가의 주장도 나의 주장만큼 혹은 나의 주장보다 더 타당할수 있다는, 한 문제에 대해 여러 답이 있을수 있다는, 완전한 혹은 변하지 않는 관점 및 사상 보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discussion 을 통해 현실적인 중도를 함께 갈구 및 고찰(考察)하는 과정. 이러한 가치있는 교육활동들이 앞서 언급한 키워드 안에서 가능하다. 아니 그 키워드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그 키워드는 학생들에게 자유를 준다. 생각의 자유. 사상의 자유. 믿음의 자유. 발언의 자유. 교육이라는 반물질적인, 대학교라는 물질적인 큰 틀 안에서 학생들은 자유롭고 자유로워야만 한다. 비지니스 측면에서 보았을때, diversity & inclusion 은 표현의 자유 그 이상이다. 좋은 마케팅 수단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모든 나라에 있는 대학기관이 어느정도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대학기관은 대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운영된다. 학생 한명 한명이 수입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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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적나라하게 계산되고, 대학은 그 돈으로 더 좋은 기숙사, 연구실, 강의실, 뛰어난 운동선수들 그리고 더 저명한 교수들을 초빙하기 위해 힘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의 대학교육은 철저히 자본이라 쓰고 자본이라 읽는다. 더 비싸게 부를수 있는, 더 많은 “큰 고기들” 혹은 International students (외국/유학생들)를 유치하기 위해 diversity & inclusion 이라는 키워드 외에 더 효과적인 문구가 있을까? 세상에는 서로 섞이지 말아야 할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교육과 정치가 아닐듯 싶다. 정치적 이념에 쏠려 돈을 무기로 교육의 핵심비전, 철학 및 다른 중요한 교육가치들을 짓밟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될것이다.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 투쟁하라는 말은 곧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부정하라는 말과 같다. 한 인종을 위해 다른 인종이 희생양이 되는 이런 딜레마 같은 상황. 현실적인 더 나은 방안, 공공의 이익, 다양성의 존중보다는 개인적인 혹은 한 집단의 이익, 탐욕을 전제로 하는 이러한 당파싸움은 정치판에서만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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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5 미국 K-12 시스템의 불편한 진실 학문적 배움을 위해 우리는 학교라는 곳을 어릴때 부터 시작해 꽤 오랫동안 다닌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K-12 공립 학교 시스템을 보편화 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합쳐 총 12 년의 공교육과정을 필요로 한다. 12 년이라는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다방면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다. 하지만 이 12 년이라는 기간 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대로 된 writing 실력을 갖추지 못한채 대학에 진학한다. 어떠한 학문을 진지하게 공부할 때 탄탄한 writing 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학업적 정진의 한계를 다 다르는 것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K-12 공립 교육시스템은 진정성 있는 writing 교육을 회피 혹은 포기한 듯 쉽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말하기” 정도의 급으로 인식하지만, writing 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생각 했을 때 writing 의 반은 기술이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writing 또한 그냥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형화된 과학적인 그리고 논리적인 체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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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과 시간이 기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실력이 향상된다. 우리가 writing 하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문법, 스펠링, 단어 선택 등은 writing 요소에 아주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 Writing 은 내 글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획 (outline)을 설립하고, 각 문단을 어떻게 구성할건지, 핵심 논지 (thesis)는 무엇인지, 어떠한 sources 를 사용할지, 서론 부분을 먼저 읽을 독자들이 이 글을 계속 읽고 싶게끔 만드는 hook 은 어떻게 만들지 등 논리가 기반이 된 블루프린트가 글쓰기의 필수 요소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논리는 적절한 배움이 없으면 이뤄지기 힘든 부분인, 엄연한 기술의 영역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Writing 을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리드해 줄수 있는 교육자가 필요 하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다. Writing 의 나머지 반은 창의력이다. 기술과 다르게 창의력은 쉽사리 배울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Socratic method 가 기반된 조기교육을 통해 writing 에서 필요로 하는 창의력의 근육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fact 가 기반이 된 정보습득보다는 why 가 기반이 되어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궁금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writing 향상에 절대적 필수 조건이다. 내가 생각 했을때 미국의 K-12 공교육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기술과 지식을 제공해 주는 곳이지 창의력을 길러주는 곳은 아니다.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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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학업공장인 마냥 똑같은 지식을 서로 다른 학생들에게 주입한다. 이러한 교육환경에서 진정성 있는 그리고 효과적인 writing 수업 그리고 그로 인한 writing 향상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매우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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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6 공립 같지 않은 미국 공립학교 시스템 Public 이라는 영어단어 는 publicus 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둔다. “대중의” 또는 “공통 흥미 혹은 공통 관심사의” 라는 큰 뜻에서 이해하면 될 거같다. 하지만 이 Public 이라는 단어를 미국 공립학교 시스템에 적용시키면 적지 않은 혼란이 생긴다. 미국에서 G1-12 (초, 중, 고등학교) 교육시스템은 대부분 공립으로 이루어져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 90%의 G1-12 학생들은 공립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그 만큼 미국안에서의 공립학교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미국에서 공립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크게 한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현재 거주지가 학생이 진학 할려고 하는 학교 구역(district)에 위치해 있으면 된다. 예컨대 학생이 진학 하고자 하는 학교가 McLean High School 이라고 했을 때, 거주지가 Fairfax County 안에 속해있고, 학교로부터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 거주지 조건 (Residency Requirements)이라는 특성이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많은 혼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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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앞서 설명했듯이 공립이라는 뜻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다수의” “공통을 위한”으로 이해할수 있다. Public restroom, public space 등 public 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누구든 규제없이 사용 혹은 입장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말그대로 public 은 대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약 혹은 조건이 있으면 안되는게 맞지 않을까? 제약 혹은 조건을 두고 소수를 위하고 싶으면 private (사유의)이라고 부르면 된다. 미국 공립학교 시스템은 마치 사립으로 구성 그리고 운영 되는 거 같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public 학교를 리스트한 후 비교 분석하여 선택하기 보단 내 거주지에 따라 오직 한가지 선택만이 가능해진다. 가감없이 이야기해보자면 학교선택에 있어 주거지 조건은 사회주의적 명령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랭킹이 높은 대부분 미국내 공립학교들이 소득이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 했을 때 모든 학생들에게 동질의 교육을 제공해야만하는 공립학교들은 교육정책 혹은 정치 (예. funding)에 너무 많이 휘둘려 막상 공립학교로서 해야할 교육철학을 훼손해 가는건 아닌지 아니 이미 훼손해서 복구가 불가능한건 아닌지 개탄스럽다. 동질의 교육을 차별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제공해야 할 교육단체가 오히려 교육의 불평등, 차별을 선동하고 있진 않은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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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왜 내가 가고 싶은 공립학교를 내가 정하지 못하는지. 말은 공립학교라지만 미국 전체를 봤을때 차별없이 왜 동질의 교육을 제공할수 없는지 아니 제공을 안하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립교육이 이것인지? 이사 없이는 질 좋은 공립 교육을 받을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정말 모든 공립학교가 차별없이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면 공립학교에 랭킹이 매겨질 필요가 없고, 조금 더 좋은 랭킹을 받은 공립학교에 배정받기 위해 주거지를 선택해야 되는일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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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7 법치 미국 눈치 한국 미국에 살다 보면 눈치 라는 녀석의 빈자리를 매순간 느낀다. 행정업무를 위해 공공기관을 가도, 개인적인 업무를 위해 상점을 가도, 일반적인 혹은 비지니스에서의 인간관계를 봐도 대부분 눈치라는 것이 공식에 빠져있다. 법과 규칙이 곧 예의, 예절, 에티켓인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눈치라는 녀석은 눈치만 보고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 일반 상점 직원들 혹은 학교나 그 외에 전반적인 단체들에 속해 있는 사람들. 대부분 하나같이 답답하다. 딱히 법과 규칙을 따르는 것 같지도 않다. 개인의 취향과 독립성이라는 포장지로 그들의 답답한 행위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나태함과 무기력함의 그 자체다.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인간의 나약함과 게으름을 전제로 한다면 미국사회 구성원들은 노예나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다를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딱히 안하고 그럴싸한 행위를 하지않는게 미국이라는 법치국가에서는 덕이요 혹은 도리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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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치라는 한국말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영어 단어는 없다. 근접한 표현으로서는 being conscious of others 정도 일텐데 이건 단어가 아니고 구(phrase)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또한 본질적으로 한국어는 영어와 달리 한 단어가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혹은 포괄적인 뜻을 갖기 때문에 눈치 라는 뜻이 being conscious of others 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는 거 같다. 본능적이면서 생존을 위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지각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타인 등 외부의 요소들도 동시다발적으로 지각 및 식별을 해야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눈치 라는 것은 심장이 스스로 알아서 뛰는 것처럼,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된다고 보면 된다. 이 자연스러운 현상의 산물인 눈치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시선은 다소 차갑다.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 눈치 보지 말고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등등 눈치를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반면 일터에서는 소위 눈치 없는 직원이 미움을 받곤 한다. 적절한 트레이닝 혹은 가이던스를 하나부터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도 그저 알아서 눈치껏 하는 직원은 사랑을 받는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거 같다. 일터에서 만큼은 아니 공적이든 사적 일을 처리 할때 일종의 센스 정도의 급으로 인식하는 눈치. 한 각에서는 미덕이요, 다른 한 각에서는 악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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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적용성 혹은 큰 맥락을 떠나서 보았을 때, 눈치 라는 녀석 자체는 우리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 꼭 필요한 존재이다. 법치국가 미국사회에서 매우 중요시 하는 이른바 매뉴얼화된 규칙들은 때론 매우 답답하고, 사회구성원들을 기계 혹은 노예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위험에 빠뜨리기 까지 한다. 큰 위급상황 혹은 나라 재난 (예컨대, 총기사건, 테러 등)이 터졌을때 매뉴얼 혹은 포로토콜로만 기반된 상황처리 방식은 더 큰 위급상황을 초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부적절 및 실패의 원인이라고도 생각할수 있다. 크게는 커먼센스에 기반된 눈치가 위험을 직면 했을때 더 효과적인 프로토콜로 작용 할수 있다. 매뉴얼 때문에 시간이 지연된 경찰들에 대응. 그로 인해 더 많은 사상자가 생기는 경우. 대부분 총기사건의 결말이 그렇다. 마치 더 많은 인명피해를 기다리는 건지. 줄에 사람이 없는데도 고객을 맞아주지 않는 항공사 직원, 알고 보니 본인은 오늘의 응대 고객 수가 일정 수를 넘었기에 더 이상 업무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있던 직원. 누구를 위한 매뉴얼 이고, 뭐가 효율성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법치국가 미국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건 효율성, 체계도 아니다.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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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8 철학원의 두 얼굴 대학교 3 학년 여름방학 때 기회가 되어 한국에 방문 한적이 있다.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나는 한국 방문에 대해 매우 설렜던것으로 기억한다. 삼겹살, 눈치, 절, 산, 부지런함 등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한국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방문중에 조금 생소한 것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다. 길을 걷다 보니 “철학원” 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생각보다 꽤 많이 자주 보였다. 철학원 이라고 쓰인 글귀 아래 약간 작은 글씨로 사주, 운세, 궁합, 작명, 토지 등 다소 생뚱맞은 부주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철학원은 타로, 궁합 이라는 더욱 더 이해 안가는 단어들이 보였다. 철학원? 철학을 배우는 학원인가? 철학을 배우는 학원이랑 운세랑 무슨 관계가 있지? 한국사람들이 이렇게나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소크라테스가 참 좋아했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철학원은 내가 알고 있는 철학과 전혀 관계없는 곳이었다. 일종의 역술가 (소위 한국판 fortune teller)가 사람의 얼굴 (관상), 손금, 띠, 이름, 생일 등 개인정보 또는 개인특성을 가지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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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람의 미래, 성공, 부 등에 대해 조언을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역술원 이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상관없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당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던 나는 적지 않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고대 아테네에 위치한 웅장한 플라툰의 학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순대 국밥집 옆 혹은 허름한 상점 옆에 위치한 철학원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철학은 사주, 운세 혹은 궁합같은 대학 과정에서 배우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이였다. 허름하고 낡은 상가에 위치한 한국의 ‘철학원’을 보며 철학이라는 논리에 기반되며 이성적인 학문에 심취해 있던 한 철학도는 슬픔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이 한국사회에서 많이 생소하고, 낯설고, 추상적으로 받아진다는것 인정한다. 한편으로는 역술가들이 철학원을 상호로 정할만 하다. 역술원이라고 대놓고 비과학적인 분야를 다룬다고 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이고 철학이라는 단어뒤에 숨어서 간접적으로 애매모호하게 어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철학은 이성적인, 과학적인 학문보다는 미신적이며 유교 혹은 종교에 기반한 학문으로서의 인식이 보편화 된거 같다.철학은 종교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미신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더욱이 수익이 많이 날 수 있는 땅이 어딘지 알려주는 학문은 더더욱 아니다. 철학은 철저히 논리에 기반되어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사고를 할수 있게 도와주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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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모든 학문에는 철학이라는 양념이 있다고 볼 수있다. 미술철학, 과학철학, 스포츠철학, 물리철학, 의료철학 등 모든 학문분야에 철학이라는 양념을 첨가할수 있다. 첨가된 철학이라는 양념은 해당 학문 맛의 깊이와 풍미를 더욱 더 진하고 풍부하게 도와준다. 철학은 단순히 표면적인, 실질적인 지식의 깊이를 넘어 본질적인 뿌리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식의 깊이를 쌓는 행위. 마치 되돌아 가는, 퇴보하는, 되새김질까지 하는 느낌을 준다. 다이나믹하고, 실질적인, 삶의 진보적인 추세를 선호하는 요즘 유행하는 학문들하고는 매우 대조적이다. 철학이 한국에서 홀대받는 첫번째 이유다. 격변하고, 다이나믹하고, 급한 한국사회에서 철학은 불필요한, 왜 굳이? 정도 급의 학문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중심에는 논리가 있다. 논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다. 철학에서 모든 주장은 전제에 기반된 결론을 통해서만 그의 합리성과 정당성이 인정된다. 과학과 다르게 관찰 혹은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수 있는 논리를 가질수 있다. 예컨데, 다음 두 전제가 있다고 하자. (A)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이 두 전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출할수 있다. (C)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처럼 관찰과 실험없이 전제만 가지고 타당한 결론을 낼수 있다. 서양에서의 철학은 이처럼 논리가 중심이 되어 체계성있는 이성적인 학문으로 거듭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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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양철학자들 (예컨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리스, 칸트, 데카르트, 니체 등)은 논리에 기반된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인류를, 인간을 더 이해할수 있도록 철학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한국은 다르다. 전통적으로 미신 (예컨대 무당, 역술가, 점쟁이 등)과 감성에 치우친 사회 그리고 이러한 풍토현상 때문에 논리성, 이성을 요구하는 서양철학이 아쉽게도 설 자리가 없다. 철학이 한국에서 홀대받는 두번째 이유다. 예컨대 학교에서든 일터에서든 혹은 길에서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논리적으로 의견을 좁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문제를 받아들이고 답을 접근하는 방법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매우 치우쳐 있다. 또한 믿음의 출처를 과학적인 근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고 말 그래로 믿음 (Faith) 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존해 믿고 더 나아가 맹신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무당 (Shamanism)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유다. 내가 한국 방문에서 접한 철학원. 진짜 철학과는 아주 무관한 것을 하는, 가짜 철학을 하는 곳이었다. 아니 가짜 철학도 아니다. 사주, 운세 궁합등을 풀이해 주는 역술가를 어찌 철학자 그리고 그가 행하는 행위를 철학이라고 볼수 있을까. 논리성이 없는. 이성적이지 않은. 믿음을 전부로 행하는 행위. 역술과 다르게 철학은 미래를 알 수 있게 풀이해 주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논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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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가지고 현재를 현명하게 살수있게 도와 주는 학문이다. 철학원, 아니 역술원이 진정으로 철학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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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9 조기(早期)교육에서 왕따당한 만기(滿期)철학 최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일종의 인문/교양(?) 서적이 한국에서 꽤 많은 독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듯 하다. 마흔에 겪을 만한 고난 혹은 위기에 대해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 같은 책인 것 같은데 문제는 책 제목이다. 내용만 봐서는 전혀 이 책이 “마흔” 혹은 “쇼펜하우어”라는 키워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출판사 리뷰에 따르면 “마음의 위기를 다스려야 하는 마흔에게 필요한 철학수업” 이라고 적혀져 있다. 마음의 위기는 마흔만 다스리나?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마흔에게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철학이라는게 대체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런 철학수업도 있었나?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느 구매자의 리뷰에서 참으로 공감을 얻었다. “딱히 마흔과 관련이 없는 책인데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습니다.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쇼펜하우어 이름을 빌려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네요.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철학책이라기 보다는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것 같았고 그래서 저는 많이 실망했습니다. 마흔 살의 어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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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극복해보고자 샀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네요.” 휴우, 나만 혼란스러웠던것은 아니였던 것 같다. 나라를 막론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왜 철학이라는 학문을 나이가 들어서 해야하는 것처럼 인식할까? 철학을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철학에게 위로를 받고 등등…꼭 나이가 들어야만 찾는 학문으로 착각하는것일까? ‘지식을 사랑하라’는 철학의 그리스언어의 어원에 따라 지식을 사랑하라는 말을 지식이 좀 쌓은다음 접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걸까? 철학을 배우기위한 혹은 접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중 하나가 나이가 좀 있어야 하는걸까?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사고력, 논리력 혹은 생각의 깊이와 같은 공부/학습에 꼭 필요한 스킬들을 배울수 있는데, 이 좋은걸 왜 조기교육화 하지 않을까? 철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 접근성이 쉽지 않다는거 인정한다. 철학서적 및 대부분 철학자들의 주장이 심오하고 10 번 이상 읽어도 확 와닿지가 않고 긴가민가 할때가 그렇지 않을때보다 많다. 미국 대학교에서 철학 전공자들이 철학수업을 들을때 평균적으로 다른 인문학전공 (예컨데 역사 혹은 영문학) 수업에 비해 읽을게 적다. 양보다는 깊이로서 한 문단 (평균적으로 6-11 줄) 혹은 몇 안되는 문단들을 인간이 들어갈수 있는 최대 깊이로 들어가 고뇌하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분석한다. 당연히 사고력과 논리력이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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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향상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러한 스킬은 어릴때 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조기영어, 조기수학, 조기유학 등 필요한 기술, 학문 혹은 경험 앞에 “조기”라는 단어를 붙여 조금 이라도 일찍, 조금 이라도 어릴때 배우거나 경험하기를 장려한다. 어린 학생들의 사고력 혹은 논리력 향상을 위해 철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두말하면 잔소리다. 철학은 따뜻한 격언을 통해 어른들의 아픈 마음의 상처를 위로 혹은 치료해 주는 학문이 아니다. 힐링캠프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식의 달달한 표현으로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다. 철학은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타당한 주장을 하고, 반론하고,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질 높은 지식의 깊이와 이해를 달성하는 지적활동 이다. 그러한 지적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더욱 더 인간적으로 숙성된다. 마흔을 위한 혹은 이십대를 위한 철학따윈 없다. 나이든 사람을 위한, 나이든 사람이 하는 학문 이라는 다소 불편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철학.” 학생들이 만기(滿期)철학 하지말고 조기(早期)철학 하는 그 날이 올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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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0 이기적인것이 이타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기심 (selfishness 혹은 self-interest)” 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곤 한다. 일상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미디어 매체를 통해 우리는 이기심을 일종의 못된, 비도덕적인, 비인간적인 또는 죄악스러운 정도의 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주인공 혹은 시청자에게 사랑을 받는 캐릭터는 대부분 착한, 이타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특히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유교적인 특성과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기독교적인 성향을 고려 했을 때, 이 두 나라에서 “이기심” 이라는 단어는 특히 더 불필요해 보이기 까지 한다. 한국사회에서 이기적인 사람은 정이 없는 사람, 다양성을 중시하는 미국사회에서는 리더십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이기심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 인간에게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불필요한 것일까? 아인란트와 아담 스미스의 지혜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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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아인란트 (Ayn Rand)는 러시아계 미국 철학자이자 작가였다. Objectivism (객관성)을 기반한 그녀만의 독특한 철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기심을 조금 더 이성적인 접근방법을 통해 이해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아인란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기심은 개인의 발전 및 행복을 위한 이성이 중심이 된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핵심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 중심이 된 점이다. 순간 드는 욱하는 감정 혹은 기분 또는 쓸데없는 고집 혹은 개똥 철학을 떠나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고 지지 할수 있는,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만한 일종의 과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는 틀을 말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틀은 주관성을 넘어 객관성을 띈다. 다시 말해, 아인란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기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스로의 행복과 이득만을 생각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행복과 이득이 한사람에게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적용되는 일종의 이타적이기까지 보이는 이기심을 얘기한다. 적어도 아인란트에게는 이기심이라는 것이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영국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Adam Smith)는 타계 한지 230 년이 넘었지만 경제학의 아버지, 보이지 않는 손 등 경제학계에서 아직도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스스로의 발전 및 행복 증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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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회구성원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경제적 발전까지 덩달아 함께 늘어난다고 굳게 믿었다. 다시 말해 스미스에게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본주의 경제의 엔진과도 같았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과 경제적 자유주의가 만났을 때 그야 말로 자본주의 경제의 대박이 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본주의 경제가 자동차라고 한다면 인간의 이기심은 자동차 원료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기심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거나 혹은 감성에 기반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아인란트와 아담 스미스가 주장하고 지지하는 이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기심의 정반대이다. 감성이 아닌 이성이 중심이 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아닌 도움을 주는, 더 나아가 사회의 악이 아닌 선, 그들은 이러한 이타적인 이기심이 인간 개인에게,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정이 있을 수 있고, 이기적이면서 리더십까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속해 있는 현 사회에서는 이기적인것이 이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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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1 죽은 글쟁이의 사회 글쓰기라는 지적 활동은 본질적으로 어렵다. 창의력, 논리성, 꾸준함, 참을성, 실행력 등 꽤나 많은 자질 혹은 기술을 요구한다. 기술의 발전, 사회의 변화와는 무관할 정도로 우리에게 글쓰기라는 행위는 늘 어려웠고 지금도 변함없이 어렵다. 그래서인지 조금 과장하자면 아무도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 글의 종류가 일터에서 요구하는 보고서 이든, 학교에서 내주는 에세이 과제 혹은 대학교 논문이든, 일상생활에서 쓰는 이메일이든, 아무도 스스로 자기의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필요 이상으로 디지털화된 현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기업 및 대다수의 스타트업 회사들은 AI (“인공지능”)에 꽂혀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죄다 AI 기술 R&D 및 implementation 에만 열중하고 있다. 제 4 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 하에 “인간의 편리성” 혹은 “인류의 대 혁신”이라는 위선적인 문구로 수입 창출에만 몰두해 있는 그들의 속은 반인류적인 이기심을 깨끗히 덮는다. 대중들 역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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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반인류적인 수입 창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회사들에게 뜨거운 박수갈채와 응원을 보태어 준다. OpenAI 라는 스타트업에서 만든 ChatGPT 가 이른바 대박이 나면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보란듯이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 과제 혹은 대학입시 에세이에서, 직장인들은 업무에 필요한 이메일 및 보고서에서, 그 외에 일반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짧은 글 조차 쓰기 귀찮거나 싫을 때, 알고리즘으로 풀 장착된 기계덩어리가 우리의 지적 행위를 대신해 주고 있다. 편한 것, 효율적인 것에만 너무 취중 되어 있은 현시대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 효율적이지 않는 건 불필요한 것을 넘어서 하면 안 되는 것으로 까지 어느정도 자리 잡은 거 같다. 거기에 AI 에 푹 빠진 회사들이 기름을 붙는다. 흠뻑. 앞서 언급했듯이, 짧은 글을 쓰든 긴 작문이든 글쓰기는 우리에게 꽤 많은 자질과 기술을 요구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시간, 열정 등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쉽게 말해 대부분 많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매우 비효율적인, 굳이 안하면 안할수록 좋은 지적 행위 인 것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엉터리 단어 몇개를 엉성하게 연결시켜 대강 문자를 보내는 행위로서 글쓰기를 대신하고 있진 않은지. 그것마저 귀찮아 Hey Siri 를 찾고 있진 않은지. 지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동물 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이라는 우리.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능력.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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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Gutenberg 의 typewriter 를 통한 책 출판 및 대중들에게 보급. 인류의 문명이 지금 현 위치에 있기까지 책이라는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만들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지적인 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누군가에 의해 책이 한권, 한권 쓰여지고, 그 책들이 모여 공동 지식을 만들어 낸다. 이 공동 지식을 통해 우리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점점 성숙, 발전되어 간다. 이 모든 것의 시작 그리고 중심에는 글쓰기가 있다. 아주 인간적인 지적 행위. 인간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면서 가치 있는 행위. 왜 이러한 가치 있는 행위를 기계 덩어리 따위에게 양도 할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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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2 인공지능의 불편한 진실 ChatGPT (이하 “GPT”) 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검색 수단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업무적으로 이메일을 쓰거나 학교 과제를 해주는 “대리인” 으로서의 역할도 꽤 만족스럽게 해내는 것 같다. 이번년도 5 월에 시행된 Intelligent.com 의 설문지에 따르면 1223 명의 대학생들 중 30%가 GPT 를 사용해 과제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46%는 과제를 위해 꽤 자주 GPT 를 사용한다고 했다. GPT 를 이용하여 얻은 과제의 결과 또한 평균 혹은 그 이상인 것을 고려 했을 때 적어도 “교육”분야 안에서 GPT 의 능력과 영역이 머지않아 인간을 대처 혹은 더 나아가 넘어선다고 하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닐수도 있다. (Ray Kurzweil 의 the singularity 이론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시기를 2045 년 쯤으로 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인공지능이 인간 자체를 대처 할 수 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리철학에서 자주 쓰이는 qualia 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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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소위 인간은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가장 슬픈 생명체라고도 한다. 동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스스로가 태어나고 죽는걸 인지 ([self-]aware)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우리의 경험들을 “내 것” 으로 만들어 준다. 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통해 완성된 주관적인 “내” 경험들을 qualia 라 한다. 예를 들면 내 앞 테이블에 노란 레몬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레몬을 씹으면 매우 신 맛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눈물이 핑 돌 것이다. 혹은 초코렛을 입에 넣고 녹이면서 먹을때의 나의 행복한 기분, 혹은 아주 매운,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그날의 스트레스를 매운 라면과 함께 증발 시키고자 하는 모습과 같이 신맛, 달콤한 맛 그리고 매운맛을 느낄때 이 때의 기분이 qualia 이다. 단순히 음식이 제공하는 맛을 넘어 그 맛과 연결된 나의 기분, 표정, 행동 등이 qualia 이다.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바로 그 경험을 하고 있는 주체자만이 가질수 있는 매우 특별한 특권. qualia 는 그 경험의 자체이고 그 경험을 하기 위해 “인지” 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인공지능이 Shakespeare 와 유사한 시를 쓰고 에세이를 대신 작성해주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공지능이 과연 qualia 를 가질수 있을까? 시를 쓰는 동안에 여러가지의 생각, 고뇌, 상상 그리고 그것들로 파생되어 느끼는 슬픈, 우울한, 행복한 등의 감정. 주체자로서만 입장(access)이 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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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특권. 학교 에세이 과제를 마감 전날밤에 Red Bull 을 벗삼아서 초조하고,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한 단어, 두 단어 써내려가며,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서 마음을 다시잡고 또 한 단어, 두 단어 써내려가는 의지와 끈기. 어려운 수학문제를 앞에 두고 끼니를 거르면서 하루, 이틀 풀어봐도 답이 안 나오다 결국 마침내 정답을 찾았을때의 희열과 벅찬 기쁨. 인공지능은 이러한 qualia 를 절대 가질수 없고, 인지 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인 것이다.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운 지능을 통해 인간의 일부분을 흉내 내려 하는것. 누군가는 인공지능이 qualia, 즉, 인간만이 느끼는 주관적인 기분을 느껴야 할 필요성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 특히 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과 같은 창작 업무는 지능만으로 우수한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창작은 인공지능이 습득하는 일련의 알고리즘을 넘어선 기쁨, 분노, 감동, 억울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융합되어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업무이다. 이는 인공지능이 교육 분야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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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3 니체의 눈으로 본 MZ 세대 소위 MZ 세대 (크게 1981 년생부터 2012 년생까지 포함) 라는 그룹은 다른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매우 대범하고 “개성”이 넘친다. 특히 10 대 중반부터 20 대 중반까지의 연령대를 대표하는 Z 세대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일찍 디지털화 된 세대이다. 종이책 보다는 e-book 이 더 익숙한, 공책에 학교수업 내용을 필기하기보다는 laptop 이나 tablet 이 더 자연스러운, 현실공간보다는 TikTok 이나 YouTube 같은 가상공간에 더 흥미를 느낀다. 성격 또한 전 세대들과 많이 다르다. 일정한 규칙과 사회질서 혹은 규범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만의 새로운 규칙, 자신이 중심이 된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기 까지 한다. 앞선 세대로 부터 내려오는 가치관, 습관, 규범을 스스로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조금 더 “나”를 위한 삶을 즐기는 당돌하고 도전적이며 직설적인 MZ 세대, 어떻게 하면 그들을 좀 더 이해할수 있을까? 니체에게서 조금이나마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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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독일이 낳은 비운의 철학자, “신은 죽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로 우리에게 나름 친숙한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1844 년 독일 Roecken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터 생각하고 비판적인 질문하는 걸 즐겨한 니체는 기독교 사상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사회가 정해놓은 규칙, 규범, 윤리 그리고 도덕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 었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혐오했으며, 인간이 진정 “인간다운”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질서”라는 명분 아래 인위적으로 만든 잣대, 규칙들로 부터 멀어져야 한다 주장했다. 단순히 수동적인 회피가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스스로가 능동적인 크리에이터 (Creator)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크리에이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정해진 가치(Values)를 가지고 태어나는게 아니라 백지상태로 태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세상에 분출해야 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불필요한” (예. 사회규범) 것들을 초월한다. 이 초월한 인간을 크리에이터 혹은 Uebermensch 라 칭할수 있겠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Uebermensch 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슈퍼맨을 뜻한다. 어떠한 역경과 고난 그리고 비난을 홀로 무릅쓰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버팀목이자 정신적인 위안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최고 경지를 나타내주는 위치. 많은 사람들이 슈퍼맨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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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니체가 말하는 이 슈퍼맨은 동시에 다수를 위한 규칙, 습관들로 부터 과감히 벗어나 스스로에게 맞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자신만의 가치관 및 자아실현을 위한 삶을 쫓는 초인간 일 것이다. MZ 세대를 이기적이다, 책임감이 없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시선보다는 그들의 창의력, 추진력 그리고 대범함을 높이 세워주는게 어떨까 싶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과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고 그 중 누군가는 제 2 의 Steve Jobs, Elon Musk 혹은 니체가 말하는 Uebermensch 를 꿈꾸며 세상을 이롭게 바꿀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컨텐츠 크리에이터가 진정한 크리에이터가 될 꿈을 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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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14 에세이라 쓰고 대필이라 읽는다 소위 에세이라고 불리는 이 녀석, 상당한 이슈를 몰고 다닌다. 학교 과제, 논문 혹은 그 외 대회라는 영역에서 불미스러운 사례를 만드는 장본인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에세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더 까칠하다. 어느 유명한 교수 혹은 장관의 박사 논문이 누군가의 의해 대필 되었다든지 어느 유명한 기업가의 자녀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아 학교 에세이과제를 했다든지 등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례들이 생각보다 꽤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이슈를 만들바엔 그냥 혼자 써버리면 되는데 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완성이 되는 에세이, 도대체 우리는 왜 에세이 쓰기가 힘들까? 한국어로 수필이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큰 맥락에서 보면 글의 한 종류이다. 어떠한 이들은 크게 페이퍼라고도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에세이와 페이퍼는 다르다 (허나 이 글의 목적상 둘의 다른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한국어로 수필이라고 불리는 이것, 어느 누군가는 페이퍼 라고 칭하는 이것. 에세이는 학업 목적을 위해 쓰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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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것을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 주관적인 글 정도로 크게 이해 하면 될 듯 싶다. 미국에서는 학교 과제라는 맥락 안에서 주로 쓰인다. 에세이란 주관적인 생각, 주장 그리고 그것을 뒷바침 하는 증거 및 분석을 체계적인 틀 안에서 논리적으로 글로 풀어내는 활동이다. 다시 말해, 에세이는 어떠한 주제를 가지고 (A)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B)논리가 기반된 체계적인 틀 안에서 글로서 표현하는 작업이다. (A)는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고 (B)는 과학적 이해 (예컨대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글의 구조)가 필요하다. 따라서, 에세이를 잘 쓸려면 예술적 그리고 과학적 이해와 재능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봤을때 (B)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지만 (A)는 가지고 태어나야 하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수학적 혹은 음악적 재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에세이 쓰기를 꺼려하거나 중도 포기한다. (A)가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의 에세이 교육은 많이 뒤처져 있다. (B)영역만 너무 치우쳐 교육이 되고 있다. 대부분 (A)영역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도, 딱히 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그저 남들과 비슷한 혹은 남들이 원하는 대답 위주로 글을 쓰면 된다. 그게 한국 일반 교육에서의 에세이 인거 같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논리적으로 말을 한들 에세이만 쓰라고 하면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세이를 쓸 시간이 없어서?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쓸려니까 안써져서?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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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핑계를 대며 누가 대신 써주면 안될까 하며 대신 에세이를 써줄 사람을 알아보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에세이를 쓰지 못하는 혹은 쓰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덩달아 대필을 하는 사람들을 딱히 비난 하는게 아니다. 서로의 입장이 있고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이 있는 것이기에 내가 판단할 혹은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누구나 쓸 수 있을거 같은 에세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인지 하고 에세이를 잘 쓰기 위해서 스스로가 필요한 조건 (예컨대: (A)영역)을 만족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도움을 적절히 받을때 도움을 받는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도 서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제 가는 에세이를 대필이 아닌 에세이로 읽힐 날이 온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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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Joh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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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국, 독일 그리고 철학과 에세이” 그를 나타내는 수식어는 3 개의 국가와 2 개의 교육 관련 키워드로 압축된다. 철학으로 밥은 먹고 살겠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지만 그는 철학을 너무 사랑하고, 철학으로 밥도 먹고 간식도 배부르게 먹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것들이 빠르게 처리되고, 편리해졌다. 그 속에서 인간 고유의 색깔과 논리 (Hues & Logic)를 통해 자기만의 색깔이 듬뿍담긴 논리적인 에세이를 쓰며 가르친다. 이 책은 다수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철학과 에세이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 풀고자, 나아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보고자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미국 University of Virginia 에서 철학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독일 Ruhr-Universität Bochum 에서 인지과학으로 석사를 취득하였다. J&B Essay Consulting, LLC 를 설립 후 미국 Virginia 에 거주하면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에세이 교육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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